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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설계

비건축으로 독립생존기 8

2022. 1. 17.

개업을 전후로 총 3번의 현상 공모에 응모했다.

직원으로 사무실을 다닐 때에는 현상 공모에 대한 인식이 참으로 좋지 않았다. 현상팀에 불려 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밤샘을 예약하는 것이었고, 일정 시간 안에 해내야 하는 일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수주 업무 처럼 건축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침서가 등불 같은 존재였지만 결국 윗사람들의 컨펌이 하나의 방향이 되었고, 직원들이 서로 안을 만들어서 으샤으샤 진행이 될 때쯤에는 어느새 소장이 나타나 리셋이 되기 일쑤였다. 이전 사무실에서 진행하던 현상 설계 안들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이 뒤범벅되어 어울리지 않는 성형 건축물이 되어 있었던 것은 별로 큰 일은 아니었다. 물론 결과가 좋지 않는 사무실만 근무했던 경험이라 좋은 결과를 내는 사무실들은 다를 거라 생각한다.

사무실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현상 설계는 사무실 디자인 철학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당선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꾸준히 현상 설계에 참여하면서 프로젝트가 쌓이고, 하나의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나아가면 나중에 당선된 프로젝트도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당선되면 여러 미디어에 소개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또한 사무실 운영에서 고정적인 수입이 기대되지 않을 때 현상 공모는 매우 중요한 기회이다. 최소 1억 이상의 설계비가 책정된 공공 건축물들은 각 지자체에서 설계 용역의 일반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장터에 2~3개월 후 제출 마감으로 두고선 올라오는데, 직원이 소수인 사무소들은 1~2건 정도만 당선되어도, 1년 이상은 살기 위한 수주는 하지 않아도 된다. 설계비가 모두 설계사무소의 몫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민간 영역에서 알려지지 않은 영세한 사무소가 설계비 1억 이상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자리 잡는데에 좋은 기회가 된다. 비록 공공 건축물이기 때문에 각 종 인증 절차들과 보고서 작성등의 많은 업무량과 공사비 한계등의 압박이 있기는 하지만 큰 문제 요소는 아니다. 직전 사무실에서는 현상 설계에 당선된 프로젝트를 납품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량에 대해서는 충분히 가늠할 수는 있었고, 실제로 운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무수히 많이 올라오는 나라 장터 현상 공고들 속에서 어떤 공모전을 응모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노하우가 필요했다. 보통 큰 지자체들은 별도의 전용 공모전 사이트를 운영하기도 하며, 교육청은 학교들만 따로 관리하여 현상 설계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모전들이 투명하게 운영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직도 지방이나 특정 영역에서는 카르텔이 있다는 소문도 있고, 인맥도 로비도 암묵적으로 있다고는 한다.(확인된 바는 없다) 하나의 현상 설계를 제출하기까지 2~3개월은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야하고, 마지막 제출 일주일에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공모전 선택을 위한 몇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총괄 건축가가 있는 지역의 공모전을 우선한다. 지자체 마다 총괄 건축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곳이 있다. 대표적으로 파주시, 춘천시, 영주시, 진주시 같은 경우이다. 총괄 건축가가 있는 곳은 공공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이 있는 곳이며, 그에 따라 설계 공모 지침서가 작성된다. 명확한 의도가 있는 지역은 납득할만한 설계안을 당선시킬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둘째,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와 대학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많은 공모전은 피한다. 많은 건축가들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중에서 알려진 분들 1, 2명이라도 있는 곳으로 우선한다. 결국 당선안은 심사위원들이 만드는 것이고, 그들에게 다른 외부의 조건 없이 온전히 제출안을 가지고 판단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려진 분들은 그들의 작업물을 찾아보기도 쉽고 성향 파악하기도 쉽다. 알려지지 않은 분들과 대학 교수들도 좋은 안을 뽑을 수 있지만, 알려진 분들이 좋은 제출안을 당선 시켜 주리라는 믿음에 기대 해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셋째, 지침서를 매우 꼼꼼히 본다. 몇 개의 공모전의 지침서를 보다 보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점점 대충 보게 된다. 하지만 지침서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지침서는 앞,뒤 면적표가 계속 다른 면적이 적혀 있거나 필요없는 문구가 들어가 있기도 한다. 이는 담당 공무원이 지침을 만들 때 다른 지침서를 참고하여 만들면서 복사한 것들이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인데, 이런 공모전은 우선 배제한다. 공모전 담당 공무원이 관심없는 공모전은 아무도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또한 설계비에 포함된 금액을 분석해보거나 제출물도 해당 공모전에서 필요하지 않는 요소까지 설계 설명서에 담으라고 해놓은 것들도 많이 발견된다. 지침서만 열심히 읽어봐도 참가하지 말아야 할 공모전은 걸러진다.
넷째, 설계비 4억 미만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설계비 1억 받기가 힘들지만, 공공 영역에서 설계비 1억은 남는 금액이 얼마 없다. 각 인증 작업과 보고서 작업량을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 1억 설계비나 4억 설계비나 면적의 차이만 있을 뿐 해야할 작업량은 비슷하다. 또한 당선 설계비가 높을수록 낙선하여도 등수에 오르면 의미있는 보상비를 받을 수 있다. 설계 제출안을 내기 위한 2~3개월도 인건비를 쓰고 있기 때문에 보상비로 인건비라도 건지려면 적어도 4억 이상은 되어야 기대를 할 수 있다. 물론 공모 프로젝트가 건축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라면 설계비에 상관없이 참가해보려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설계비 생각하지 않고 참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섯째, 프로그램을 정한다. 공공 건물은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공공 청사부터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전시관, 박물관, 복합문화센터, 도서관, 경로당, 노인센터, 장애인센터등 무수히 많다. 나는 다양한 용도에 도전하기 보다는 몇몇 용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이 설계 노하우를 쌓아가는데에도 도움이 되고, 만약 당선되어서 지어졌을 때 포트폴리오에도 연속성을 가진 사무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위의 조건들을 꼼꼼히 따진 결과 21년도에는 총 3개의 공모전에 응모했다.
처음 참가한 창원민주주의전당 건립 설계 공모에서는 비록 공식적인 결과는 낙선했지만 투표 결과를 열람했을 때 6위를 기록(5위까지 공식 결과)했다. 이어 참가한 진주 실크 박물관과 파주 문산 시립 도서관 설계 공모에서는 연달아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아직 지어진 것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사무실의 설계 제출안이 연달아 등수에 올라가고 있어서 고무적으로 생각하며, 22년에는 적어도 1, 2건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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